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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RKEL

 

W. 탕쑤

 

*설정 파괴주의

 

 

 

  여자 친구와 첫 키스를 했다.

  평소와 다름 없는 후덥지근한 여름 날, 그녀의 방에서. 분명 다나카 선배는 내게 키스를 하면 머리속에 종이 울려 퍼지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달콤하고, 정신이 아득해질 거라고 말했는데. 나에게 첫 키스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축축했고, 끈적거렸다. 여자 친구는 두 눈을 감았고, 내 목을 꽉 끌어안았다. 나는 침대 시트를 꽉 붙잡았다. 팔이 후들거렸다. 얼른 이 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렸다.

  조심스럽게 입술을 뗀 여자친구는 희미하게 웃었다.

  “멍청이.”

  “응?”

  그녀는 천천히 내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츳키는 생각보다 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구나?”

  여자친구는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어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입술에 남은 촉촉한 온기가 불쾌하기 짝이 없어, 얼른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 때였다. 방문이 벌컥 열렸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큰 키, 나른한 눈빛과, 능글거리는 미소를 가진 한 남자가. 문이 열리고 그와 두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꿇어져라 쳐다 보았다. 그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쿵, 쿵 뛰었다.

  “아 오빠 뭐야! 노크 좀 하라고!”

  여자 친구는 얼굴이 붉어진 채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야? 남자친구?”

  그는 나를 여전히 보면서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츠키시마 케이입니다.”

  “아. 오빠, 얼른 나가. 얼른!”

  “이 방 공기는 왜 이러냐? 뭔 짓이라고 했냐?”

  그의 그 말에 귓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여자 친구는 연신 내 눈치를 살피며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문에 삐딱하게 서서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는 아주 천천히 여유롭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삐딱하게 서 있는 그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내 머리카락을, 내 이마를. 내 눈을, 코를 그리고 방금 전 여자 친구의 숨결이 닿아 있던 입술을 훑어가는 게 느껴졌다. 척추 아래가 찌르르 하고 울렸다.

  “아 얼른 나가. 얼른.”

  여자 친구는 손으로 그를 밀어 내며 겨우 겨우 방문을 닫았다. 우리를 놀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야. 나 연습 간다고 엄마한테 말해라!”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마치 잔상처럼 남아 내 귀에 울려 퍼졌다.

 

 

  내 방 침대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여자친구의 이름은 쿠로오 아츠하. 나와 같은 학교 동급생이다. 그녀와 사귀게 된 계기는 간단했다. 그녀가 올해 봄, 나에게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다. 그녀는 얼굴도 예쁘고, 사랑스럽고 착했다. 학교에서 그녀를 좋아하는 이도 꽤 있었다. 내가 그녀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사귀었다. 내 첫 연애였다.

  하지만 이건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 하는 내내 나는 무심했고, 무감각했다. 첫 연애, 첫 사랑의 설렘도 들뜸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러는 걸까. 같은 동아리 다나카 선배는 연애를 할 때 마다 여자 친구에 대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안달이라고 했는데. 바보같은 히나타와 카게야마도 연애하고 싶어서 늘 동동 거리는 데. 나는 연애를 손꼽아 기다려 본 적도, 또 지금의 연애에 안달나 본 적도 없었다.

  “그건 스킨쉽을 안 해서 그래.”

  이런 내 고민을 들은 다나카 선배는 단박에 그렇게 말했다. 오호오! 스킨쉽! 히나타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말했다.

  “스킨쉽 진도를 나가면 여자 친구에 대한 마음이 바뀌지. 막 모든 걸 다 내어 준 것 같고, 더 설레고, 아찔하고, 애틋하고. 츳키랑 쿠로오양이랑 사귄지 반년이 넘어가도록 손 밖에 안 잡지? 그래서 그래.”

  그렇게 하게 된 첫 키스였다. 조급한 마음. 나는 왜 남들과 다를까. 이 조급한 마음에, 여자친구의 집에 놀러갔고 그녀와 단 둘이 방에 있었고 드디어 첫 키스를 했다.

  그런데 왜 나는 그것이 그렇게 불쾌했을까. 여자 친구는 사랑스럽고 예쁘다. 여자친구가 싫지는 않다. 그렇지만.

  순간 나는 그를 떠올렸다. 여자 친구의 오빠. 아마 쿠로오씨겠지. 그는 아주 컸다. 붉은 색 저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이 퍽이나 잘 어울렸다. 노란빛 도는 머리카락을 가진 나와 달리 아주 새까만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두 눈빛은 여유로우면서도 나른했고. 목소리는 중저음에 부드러웠다. 가슴 한 구석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나는 오늘 여자친구와 첫 키스를 했다. 그런데 왜 나는 지금 그녀와의 첫키스 보다 그녀의 오빠를 계속해서 떠올리는 걸까.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응? 우리 오빠?”

  아츠하는 나를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뜬금없어 보였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그날 우리 오빠가 널 기분 나쁘게 했지? 미안해. 우리 오빠가 완전 재수 없어서, 츳키한테 실례를…”

  “아니야. 그런거.”

  나는 그녀에게 애써 웃어보였다.

  “우리 오빠, 나보다 두 살 많지. 올해 3학년이야. 네코마 고교 라고 알아? 도쿄에 있는.”

  “알아. 거기 배구부가 강호잖아.”

  “맞아. 츳키랑 같은 배구부야. 왜, 지난번에 내가 말했잖아! 우리 오빠도 배구부라고.”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나는 애써 아는 척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여름방학이라서 잠깐 우리 집에 와 있는 거야. 이주 후면 다시 도쿄로 가. 아주 귀찮아 죽겠어. 얼른 도쿄로 갔으면 좋겠어.”

  아츠하는 툴툴거리며 말했다. 이주. 나는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솔직히 놀랬어.”

  아츠하는 자신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아이스커피가 반쯤 녹아 있었다.

  “응?”

  “츳키가 먼저 나한테 카페 가자고 말한 거 처음이잖아. 놀랬어.”

  아츠하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어디선가 죄책감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아츠하는 기분이 좋다며 콧노래를 불렀다. 나는 그녀에게 왜 죄책감을 갖는 것일까. 그 이유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지만 너무나 혼란스러워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나는 커피를 두어모금 마시고 집에 일이 생겼다며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아츠하 남자친구!”

  그가 나를 보며 빽 소리를 질렀다. 아주 반갑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얼떨결에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아, 아츠하가 자기 남자친구도 배구 한다더니! 연습하러 온 거야?”

  그를 동네 체육관에서 만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배구공만 만지작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때, 이름이…?”

  왠지 모를 섭섭함이 밀려 들어왔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츠키시마 케이요.”

  “아 맞아. 미안. 난 쿠로오 테츠로. 반가워.”

  그는 나를 보며 웃었다. 웃는 모습이 아츠하와 꽤 닮아 있으면서도 달랐다. 그의 미소를 보니 몸이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마치 구름 위로 떠오르는 느낌.

  체육관 한쪽 코드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그럼. 연습 잘 해. 그는 내 어깨를 툭하고 치고는 제 일행에게 다가갔다. 서둘러 뛰어가 웃으며 동료들에게 말하는 그를 보며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아 보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리고 싶었다. 나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내,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그를 생각하고 있었음을. 그와의 재회를 상상하고 어떤 모습일지 떠올려 보고 있었음을. 그에 비해 우리의 재회는 갑작스럽고 또 싱거워서 나는 아주 서운해 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면서 자연스레 아츠하가 떠올랐다. 내 무심함에 서운해 하면서도 내가 좋다고 웃던 그녀 말이다. 그가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렇게 가슴 무너지게 슬픈데 그녀는 내 곁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나는 애써 힘겹게 고개를 돌리고 내가 연습할 곳으로 걸어갔다.

  연습에 집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멀리서 그가 외치는 목소리가 귀에 속속 박혀 들어왔다. 초조해 졌다. 내 시선은 애써 다른 곳에 두고 있었지만 다른 모든 감각들은 그에게 쏠려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체육관 땅을 밟고, 뛰어 오르고, 환희에 찬 소리를 지르고, 실패의 탄성을 내뱉고, 뜨거운 숨을 내뱉고, 물을 마시고, 땀을 닦고, 웃고, 얼굴을 찡그리고 힐끔 나를 쳐다보고, 집중해서 공을 바라보고… 또…

 

  “츳키!!!”

 

  누군가 외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배구공이 내 얼굴에 날아들고 있었다. 그렇게 얼굴을 정면으로 맞았다. 코피가 터졌다. 붉은 피가 뚝, 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체육관에 사람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멀리 있는 그 조차도. 얼굴이 화끈 거렸다.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체육관 밖으로 나왔다.

 

  새까만 하늘에 하얀 달이 떠올라 있었다. 코피는 어느 정도 멈춰 있었다. 체육관 밖 수돗가에서 손과 얼굴을 씻었다. 얼굴에 찬 물을 붓자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거친 숨을 내뱉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나는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었다. 안경이 부러지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안경을 고쳐 썼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내 눈 앞에는 그가 서 있었다.

 

  “멍청이.”

 

  그는 중얼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괜찮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마치 폭주하듯이. 그의 목소리가 공기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를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몸짓에, 나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 같은데.

  “코피 나는 것 같은데?”

  “멈췄어요.…”

  그는 내 얼굴을 잡아 자신 쪽으로 가까이 잡아끌었다.

  “정말? 콧대 부분이 부어오르고 있다. 정말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그러자 그도 머쓱했는지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가자.”

  “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연습은 무리일 거 아니야. 기왕 이렇게 된거 흘른 피 보충이나 하러 가자.”

  “네?”

  “짐 챙기고 입구에서 만나!”

  그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 체육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멍하니 그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다. 귀신에 홀렸나? 아니면 달빛에 홀렸나? 나는 욱신거리는 코를 부여잡고, 방금 전 그가 내 볼을 붙잡고 있었음을 떠올렸다. 꿀꺽 침을 삼켰다.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것은 체육관 근처 라면집이었다. 이런 곳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담하고 평범한 가게였다. 대충 라면을 주문한 우리는 서로 마주 하고 앉아 있었다. 고개를 떨구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츠하랑은 어떻게 하다 사귀게 된 거야?”

  그가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 한 구석이 쓰라려 왔다. 어색하게 웃었다.

  “아츠하가 고백해서요. 봄부터 사귀게 되었습니다.…”

  “아츠하가 좀 적극적이긴 하지. 그게 날 닮아서 그래.”

  그는 태연히 농담을 건넸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무릎 위에 경직 된 채 놓여진 내 두 손이 두 눈에 들어왔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쿠로오씨는 여자 친구 있습니까?”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눈치 챘나? 너무 노골적이었나, 혹 귀가 빨개졌나, 목소리가 떨렸나? 나는 오만가지 생각에 빠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짧은 순간의 침묵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쿠로오씨? 쿠로오씨가 뭐야. 딱딱하게.”

  그는 별안간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나는 억지로 웃는 입꼬리가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 했지만 순간의 방심에 나는 나도 모르게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여자 친구 없어.”

  그는 무심하게 말했지만, 그의 말이 내게 얼마나 무겁게 다가왔는지 그는 죽었다 깨나도 모를 것이다. 마침 그때 주문한 라면이 나와 그의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라면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와 한 공간에서 이렇게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기뻤다. 밥을 먹고, 집으로 가는 내내 그와 나는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부끄럽고 내 마음을 들킬까봐 그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지만 점차 익숙해져 갔다. 그는 장난이 많았지만 속은 아주 깊은 사람이었다. 같은 배구부로서 진심 어린 조언을 하는가 하면, 아츠하에 대해 짓궂은 질문을 던지기도 했고, 그 외에 서로 좋아하는 영화, 음식, 장소 같은 시시콜콜한 주제로도 대화를 나누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달은 하얗게 빛났고 저녁 공기는 조금 쌀쌀했다. 우리는 함께 발맞추어 걸으며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고,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하기도 했고, 상대방의 목소리에 숨을 죽이고 귀 기울이기도 했다. 그는 환자인 나를 집에 데려다 줘야 한다며 우겼다. 우리 집에 가는 길이 이렇게 낯설었나 싶을 정도로 어색했다. 그와 함께 하면서 내가 보던 모든 것이 조각나 뒤엉켜 버리는 것 같았다.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집 문 앞에 서서 나는 말했다. 그는 우리 집을 구경하더니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집에 가서 코 찜질하고, 몸 관리 잘해.”

  말을 마친 그는 우두커니 내 앞에 서 있었다. 가지 않고 서 있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나를 뚫어져라 보더니 이내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녕.”

  그는 아주 천천히 등을 돌리곤 골목길로 걸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내 머리 위에 있던 그의 온기가 아직까지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눈물이 났다.

  그날 밤, 나는 한참이고 울음을 터트렸다. 내 온몸을 점령한 이 감정이 낯설고 혼란스러웠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이 감정이 두려웠다. 난 왜 남들과 다를까. 나는 왜 그를 보면 이렇게 가슴이 아프고, 떨릴까. 왜 이 감정은 아츠하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는가. 그가 차라리 여자였다면, 아니면 내가 여자였다면 좀 달랐을까.

  쿠로오 테츠로가 너무 좋다. 하지만 난 그와 함께 할 수 없다. 그는 아츠하의 오빠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나는 밤을 꼬박 새도로 잠들지 못하고 그저 쓰라린 속을 부여잡을 수 밖에 없었다.

 

 

  아츠하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아츠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미안.”

  나는 그저 고개를 떨구었다. 아츠하는 한참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때문에 그래?”

  한참 뒤 아츠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처참했다. 아츠하는 애써 울음을 참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떨구었다.

  “하하. 츳키 멍청이 같애…나도 다 알고 있었어. 츳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다는 거. 그래도 괜찮아. 계속 츳키랑 함께 하다 보면 너도 분명…아니야. 괜찮아. 날 좋아하지 않아도 돼. 그냥…함께 있자.”

  아츠하는 내 손을 잡았다.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두 눈동자에 눈물이 조금씩 맺혀 있었다.

  “미안. 그래도…그건 아니야.”

  나는 조심스럽게 내 손을 뺐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츠하의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뒤 돌아 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아츠하가 다 알고도 참고 있었다는 건 큰 충격이었다. 나는 정신없이 거리를 걸어 다녔다. 반년동안 그렇게 내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아주 아프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아주 큰 죄책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거리에 수많은 사람들 사이 섞여 있는 그를 발견하곤 이렇게 심장이 뛰는데.

  아츠하를 기만한 벌을 받는 것일까. 그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좋아하는 척을 했기에 이렇게 가슴 아픈 첫사랑을 하는 걸까.

  저기 멀리 쿠로오 테츠로가 걸어오고 있었다.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황급히 골목길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 순간 빗물이 툭, 툭 떨어졌다. 그리고 여름의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

  그 자리에 한참동안 서 있었다. 빗물이 온 몸을 적시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볼이 뜨거웠다. 아마 빗물에 섞여 들어간 눈물 때문이겠지. 언젠간 나도 가슴 벅찬 사랑을 하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그 사랑이 나를 이렇게 아프게 할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동네 체육관도 가지 않았다. 학교 여름 방학 부활동도 아프다는 핑계로 쉬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이제 삼일 후 면 그는 도쿄로 떠난다. 그를 너무 만나고 싶었다. 그와의 만남은 늘 짧고 아쉬웠으니깐. 하지만 그를 만날 용기는 없었다. 그를 보면 아츠하가 생각 날 것이고, 그를 보면 내 감정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넘쳐흐를 것이고, 그는 아츠하의 오빠고, 그는 이제 곧 떠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 생각으로 그저 가만히 누워 있었다. 소나기 인 줄 알았는데 장마일 줄이야.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내 방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를 들으며 몸을 웅크렸다. 그가 나를 보고 웃었던 미소, 그의 중저음의 목소리, 그가 부르던 내 이름. 그것을 떠올리면서.

  “케이.”

  방문이 열렸다. 형이 서 있었다. 형은 내게 다가왔다.

  “몸은 괜찮아?”

  “…응.”

  “누가 우편함에 편지를 두고 갔어.”

  형은 내 머리맡에 편지를 내려놓고 천천히, 방 밖으로 나갔다. 방문이 닫히고 나는 손을 뻗어 편지를 집었다. 겉면에는 츠키시마 케이군에게 라고 적혀 있었다. 편지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편지지를 펼쳤다.

 

  [멍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가 보낸 걸까. 나는 멍하니 편지를 바라보았다. 정신이 아득했다. 고개를 돌렸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고요했다.

  황급히 겉옷을 챙기고 방 밖으로 나왔다. 어? 케이! 형이 외쳤다. 아랑곳 하지 않고 정신없이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심장이 터져나가라 달렸다. 집 앞으로 오는 골목길를 지나, 공원을 지나, 학교 운동장을 지나. 빗물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흙탕물을 밟고, 진흙을 밟고 넘어질 뻔해도 멈추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달렸다. 그리고 동네 체육관 입구에 다달았다.

  숨을 헐떡이며 그 앞에 서 있었다. 문 앞으로 다가가자 배구 공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침을 꿀꺽 삼켰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츠키시마…”

 

  쿠로오 테츠로다. 진짜 쿠로오 테츠로다.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쿠로오는 홀딱 젖은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웃음을 터트리던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그에게 다가갔다.

  “이게 무슨 꼴이야.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그는 나를 붙잡고 물었다.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있잖아요. 멍청이라는 말. 그거 아츠하의 입버릇이기도 해요. 근데, 쿠로오씨도 그 말 자꾸 하는 거 알아요? 아마 두 사람 입버릇이겠죠? 누군가 나한테 멍청이라는 편지를 보냈어요. 아츠하 편지가 아니냐고요? 그럴리가요. 난 확신해요. 우리 집까지 나와 함께 걸어온 사람은 단 한 사람 뿐이거든요.

 

  수많은 말들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와 그저 조용히 두 눈을 맞추고 쳐다보기만 했다. 체육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딱 우리 둘만. 나를 가만히 보던 그는 낮은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짐에서 수건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홀딱 젖었어.”

  “괜찮아요.”

  그는 고개를 절레 절레 저었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쿠로오씨.”

  내가 그를 불렀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이 나를 향해 있었다.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연습 계속 못하게 될 거 같은데 기왕 이렇게 된 거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죠?”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당당히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그에게 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도 웃었다. 그래.

 

  체육관 샤워실에서 샤워하고 그의 여분 옷을 빌렸다. 내가 오늘 연습을 빡세게 안 해서 땀을 안 흘렸으니 다행이지. 그는 비에 흠뻑 젖은 나를 타박하며 그렇게 말했다. 냄새 안 나는 거 맞지? 그는 불안한 듯 내게 계속 물었다. 괜찮아요. 나는 그를 보며 대답했다.

  우리는 다시 그 라면집으로 갔다. 메뉴를 시키고 가만히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는 이곳에 이런 가게가 있는 줄 몰랐어요.”

  “자세히 찾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집이지.”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의 숨결이 나에게도 닿았다. 우리는 서로의 몸을 기울여 서로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그의 손이 보였다. 크고 둔탁한 손을. 내 머리를 쓰다듬던, 온기 가득한 그 손을.

  “…쿠로오씨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고개를 들어 그와 두 눈을 마주했다. 자꾸 웃음이 나오는데, 슬픈건 왜일까. 하지만 나는 애써 환하게 웃었다.

  “절대 몰랐을 거에요. 고마워요.”

  그는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른 침을 조용히 삼켰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빗소리가 들렸다. 짭짤한 라면 냄새도 났다. 그는 떨리는 숨을 내뱉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 단번에 찾을 수 있는 집도 있어.”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가슴은 간질거렸고, 숨은 떨렸고, 정신은 아득해져왔다.

  “사람도 마찬가지야.”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첫눈에 모든 걸 알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쿠로오는 끝까지 담담했다. 라면이 나왔고 우리는 말없이 라면을 먹었다. 라면은 아주 짰다. 지난번과 달리.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결국 그 라면을 다 비웠다.

 

  그의 우산을 쓰고 우리 집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산을 툭툭 두들기는 빗줄기, 비릿한 물 냄새, 차가운 공기, 서로의 숨, 가끔 스치는 서로의 손등, 함께 맞추어 가는 발.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스쳐 지나갔다.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말 없이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깐.

  내 집에 다다르자 그는 그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도 한참이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잘 들어가.”

 

  도쿄에 언제 가요? 다시 만날 수 없을까요? 이렇게 헤어지는 거에요? 다시 이곳으로 안 오나요? 이제 우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수많은 물음들을 속으로 삼켰다.

  “쿠로오씨도요.”

  나는 그렇게 말하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떨리는 숨을 내뱉고 먼저 등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 들어서서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 숨이 막혀왔다. 현관에 가만히 서 있었다. 빗속에서 떨리는 숨을 내뱉던 그, 그의 긴 속눈썹, 목울대, 따뜻한 손, 나를 맞추어 주던 발까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집 앞 골목길 까지 뛰어갔을 땐 이미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쿠로오씨!”

  빗소리에 내 목소리가 묻혀 졌다. 다시 뛰었다.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눈 앞이 핑그르르 하고 도는 것 같았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뛰어 다녔지만 그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삼일을 내리 앓았다. 독감이었다. 빗속을 뛰어 다닌 탓이라고 엄마와 형은 말했다. 고열에 시달렸다. 잠에 들면 꿈을 꾸었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났을 땐, 꿈 내용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열이 다 내려갈 무렵, 장마는 끝이 났고 내 첫사랑도 그렇게 끝났다.

 

 

 

 

 

 

 

 

 

  “역시 츠키시마야. 도쿄대에 들어갈 줄이야.”

  히나타는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웃으면서 술잔을 부딪쳤다. 시간은 생각보다 더 빠르게 흘러갔다. 3년이 흘렀고 어느덧 성인이 되었고 나는 도쿄대학에 붙게 되었다.

  “도쿄에는 언제 가?”

  야마구치가 물었다.

  “내일.”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대답했다. 카게야마는 이미 취한 채로 곯아 떨어져 있었다.

  “이야. 정말 대단해. 왜 기억나? 1학년 여름 방학때 츠키시마가 오랫동안 아픈 적 있었잖아. 그렇게 아픈 다음에 딱 나타나더니 막 전교 1등! 마치 공부 신들린 것처럼 공부했잖아!”

  히나타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말없이 술잔을 기울었다.

  어어어! 짠해야지! 짠! 술에 취한 히나타가 외쳤다. 히나타. 진정 좀… 야마구치는 당황하며 그를 말렸다. 그 순간, 카게야마가 고개를 벌떡 들었다. 그러곤 짧은 헛구역질을 했다. 야야야야 카게야마! 진정해! 화장실! 화장실! 히나타와 야마구치는 호들갑을 떨며 카게야마를 끌고 화장실로 갔다.

  하하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가게 창 밖 너머로 하얀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가게 밖으로 나와 걸었다. 그리고 우리 집 까지 걸어갔다. 지난 3년 동안 정말 공부에 목숨을 걸었던 것 같다. 배구 부 활동도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잘하냐고 히나타와 카게야마가 따져 물은 적도 있었지. 하지만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땐, 어떻게 해서든 몰두할 게 필요 했으니깐.

  찬 기운에 부르르 떨며 걸음을 빨리했다. 불이 꺼진 동네 체육관을 지나, 아무도 없는 공원을 지나,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골목길을 돌아 마침내

  “우리 집이다.”

  나는 술기운에 머리가 어지러운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집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집 앞 우편함에 작은 편지봉투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편지 봉투를 들었다. 편지 봉투에는 츠키시마 케이군에게 라고 적혀 있었다.

  숨이 막혀왔다. 심장 한 구석이 간질거렸다.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아주 조심스럽게 편지 봉투를 뜯었다. 편지지 한 장이 있었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였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슴 한 구석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정신은 아득하고, 설렘과 들뜸에 취해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하얀 달빛이 쏟아지는 날 밤,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이고 숨 막힐 정도로 간질거리는 웃음을 내뱉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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